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인츠 구데리안 (문단 편집) ==== 현역 복귀, 기갑총감 시절 ==== [[청색 작전]]의 실패로 1942년에 다시 소련을 끝장낸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히틀러는 소련의 진보된 공업력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었고 미국이 유럽을 되돌리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전간기 착실하게 만들었던 독일의 기갑부대는 거의 증발해 버렸다. 상황을 타개할 구세주가 필요했고 그는 구데리안의 능력이 다시 필요했다. 히틀러는 구데리안을 호출해 자신이 과거 그에 대해 오해가 있었음을 시인하며 사과하고 1943년 3월 1일 기갑 총감에 임명했다. 그는 기갑부대 편성과 훈련을 총괄하는 동시에 전차의 설계와 생산을 감독했다. 구데리안은 [[4호 전차]]의 생산을 중요하게 보고 4호 전차를 이용한 각종 마이너한 돌격포와 바리에이션 장비들의 생산을 막았다. 동시에 포병병과에 배속된 각종 자주포들을 기갑병과로 통합 재편성 하고자 했으나 포병장교단의 반발로 실패했다[* 영관급이나 장성급이 아닌 이상 포병들은 돌격포를 제외하면 기사철십자훈장을 얻기가 힘든 것도 한몫하였다.]. 그가 개발에 참여하지 않았던 [[5호 전차 판터]]의 개발 상황을 점검하고는 이 차량의 실전 투입은 아직 멀었음을 주장한다. [[페르디난트 포르셰|포르셰 박사]]에 의해 추진되던 [[페르디난트]]와 [[마우스 전차]] 계획을 보고는 당혹감을 드러낸다. 그는 [[성채 작전]]에 대해 극렬히 반대하였으나 히틀러는 구데리안의 전략적 안목을 불신하였다. 성채 작전은 어린 아이가 보더라도 예측할 수 있는 뻔한 계획으로 구데리안의 이론의 첫번째 조건, 적의 약한 방어선에 기습의 효과를 노린다는 대전제를 완전히 어기는 작전이었다. 한편 성채 작전을 밀어붙이던 [[귄터 폰 클루게]]는 기어이 돌아오자마자 또 자신을 반대하는 구데리안에게 완전히 꼭지가 돌아버렸다. '''클루게가 구데리안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사태까지 발생했지만 히틀러가 이를 뜯어말렸다'''고 한다.[* 1941년 강판 이후 결투를 신청했다는 이야기는 이곳 위키로부터 퍼진 잘못된 기술이다.][* 물론 결과론적이지만 성채작전은 거하게 실패하고 3차 하르코프 공방전 이후 만슈타인이 간신히 복구해낸 남부집단군은 소련군의 공세에 추풍낙엽으로 밀려나며 중앙집단군의 우측면을 노출시키게 된다.] 구데리안은 또 신병기를 투입할 때는 충분한 검증이 필요함을 강조하였으나, 히틀러는 신병기 판터가 전쟁을 뒤바꿔 줄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 판터의 양산일정에 공세일을 미루는 삽질을 저지른다. 이런 구데리안의 예견은 불운하게도 정확했으며 작전을 말아먹는데 일조한다. [* 판터를 대거 보충받았던 10기갑여단을 배정받은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경우 판터가 잦은 고장으로 목표 지점까지 돌파하지 못하는데 매우 큰 기여을 했다.] [[쿠르스크 전투]] 당시 그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 [[발터 모델]]이 지휘하는 각 집단군을 방문했다. 기갑총감 자격으로 방문한 것이었으므로 현장 지휘는 할 수 없었고, 만슈타인은 지휘권도 없는 사람이 왜 전투가 한창인 전선에 나오나고 짜증을 내며 부관을 보내 군용 열차 앞에서 대기하던 그를 상대하게 했다. 한편 이 때 부터 구데리안은 [[알베르트 슈페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독일 전차들의 생산성과 효율성 향상을 도모한다. 예편당했다 겨우 돌아왔음에도 성질을 죽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기갑총감부에서 대위로 근무하던 한 병사의 전후 증언에 따르면, 히틀러가 군비에 관해 내린 새 명령에 반발하며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그놈은 총 맞아야 해!(Der Kerl müsste erschossen werden!)"라고 소리친 적도 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